활자
계미자는 태종 3(계미?1403)년에 주성된 동활자이다 | |
활자명 | 계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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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명 | |
시대 | 조선 태종 3년(1403) |
제작시기 | |
종류 | 금속활자 |
계미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주조된 금속활자이다.
1. 계미자_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2. 계미자_송조표전총류권7
3. 계미자_십칠사찬고금통요
계미자는 태종 3(계미?1403)년에 주성된 동활자이다.
자본은 경연에 소장되었던 남송의촉본 「시」, 「서」, 「좌씨전」 등으로 하였으며, 필체는 남송본에서 볼 수 있는 글자체와 비슷한 구양순체의 바탕에 원필이 곁들여져 있다.
활자는 태종 3년 2월 18일에 주자소에서 착수하여 수개월이 걸려 대자, 소자, 특소자 등 도합 수십만 자가 주조되었다.
활자의 모양은 끝이 둥근 추형이었으며, 크기는 대자 1.4 1.7㎝, 소자 1.0 0.8㎝이었다. 계미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주조된 금속활자여서 고려말기의 흥덕사자에 비하면 활자주조에 있어 바탕글자를 새겨 부어내는 과정과 방법이 대폭 개량되기는 하였으나,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여전히 고르지 않고 또 자획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획이 부분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도 있어 인쇄상태가 깨끗하지 못하였다.
조판술도 크게 개량되기는 하였으나 사주와 계선까지 고착된 인판틀에 크기와 두께가 일정하지 않은 활자를 꽉 들어맞도록 무리하게 배열하였기 때문에 옆줄이 맞지 않고, 윗글자와 아래글자의 획이 엇물려 있거나 각 줄에는 18∼20자로 글자의 출입이 있다.
계미자의 조판법은 인판틀 바닥에 먼저 밀랍을 깔고 활자를 배열한 다음, 열을 가하여 밀랍을 녹이고 판판한 철판으로 위에서 고르게 눌러 금속활자면을 평평하게 하고 식혀서 개개의 활자가 굳어지면 인쇄하였다.
그러나 밀랍의 응고력이 약하여 인쇄 도중에 자주 흔들리고 기울어져 수시로 밀랍을 녹여 부어야 했으므로 하루에 인출해 내는 수량이 겨우 수지(數紙)에 지나지 않았다.
활자는 네모서리의 끝을 송곳 모양으로 뾰족하게 만들었으나, 활자의 크기와 두께는 물론 거친 인판틀로 인하여 인쇄 도중에 동요가 잦았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본 활자의 인본에 의하면 글자체가 약간 큰 편이며 글자의 형태 또한 고르지 않지만 균형은 그런 대로 잘 갖춰져 있다.
글자체가 크다는 것은 글자본 자체가 큰 까닭도 있겠지만, 형태가 고르지 않다는 것은 당시 주금술(鑄金術)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하여 합금의 비율이 적당치 않은 탓에 주금이 냉각할 때 수축이 심하게 됨으로써 주형(鑄型)과 같은 글자 형태가 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계미자로 인쇄된 책으로는 십칠사찬고금통요(十七史纂古今通要),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 송조표전총류(宋朝表?總類), 통감속편(通鑑續編), 춘추경좌씨전구해 권60~70(春秋經左氏傳句解卷六十~七十), 노자권재구의(老子?齋口義) 등이 있다. 자료 제공: 청주고인쇄박물관, 대한인쇄문화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