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음기
기술적 발전과 상업적 실패 | |
이름 | 에디슨 다이아몬드 디스크 축음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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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축음기 |
연대 | 1901년 ~ 1925년 |
음성 파일 |
토마스 에디슨 축음기 주식회사는 1910년대 전반에 이르러 큰 재정적 침체와 난항에 빠져 있었어요.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실린더 축음기에 비해 별 위협이 되지 못했던 디스크 축음기는 어느새 실린더 축음기의 시장을 차츰 몰아내고 시장 점유율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요.
이 무렵, 에디슨사는 자신들의 회사에서도 실린더가 아닌 디스크 음반을 제작하여 판매해야한다는 생각으로 디스크 제작 연구에 매진했어요. 1910년 1월, 그 노력은 성공을 거두었는데, 에디슨사의 디스크는 베를리너의 그라모폰 디스크와는 달리 수직으로 녹음된 것이었어요. 보통의 디스크보다 훨씬 세밀한 1인치 당 150개의 음구를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보통의 디스크보다 더 긴 음악을 담을 수 있었지요. 또한 쇠바늘 대신 실린더 축음기와 마찬가지로 작은 다이아몬드를 단 리프로듀서를 통해 음반을 재생하도록 했어요. 그리고 당시의 기계식 녹음 음반 가운데서는 음질이 가장 우수하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었어요.
에디슨은 이 디스크를 다이아몬드 디스크(Diamond Disc)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 에디슨 다이아몬드 디스크는 ‘에디슨 레코드’라는 이름 대신에, ‘재현’이라는 뜻의 ‘에디슨 리크리에이션(Re-Creation)’이라는 공식 상표로 판매되었어요. 하지만 연주자에 관한 정보도 없이 글씨를 읽어내기 힘든 반투명 유리 글씨로 곡명만 인쇄되어 있는 등, 대중의 기호를 완전히 무시한 채 에디슨의 고집만이 반영되었던 다이아몬드 디스크는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었답니다.
1915년 1월, 에디슨의 오른팔이며 다이아몬드 디스크의 개발자이기도 한 월터 밀러(Walter Miller)는 에디슨을 설득해 ‘톤 테스트(Tone Test)’라고 불리는 대규모 홍보행사를 기획했어요. 그럼, 톤 테스트의 내용을 살펴볼까요? 도시의 극장이나 콘서트홀에 관중을 모아놓고 가수가 노래를 불러요. 이 가수가 노래하는 도중에 갑자기 극장 전체의 불이 꺼지고, 미리 준비해 놓은 에디슨 다이아몬드 디스크 축음기가 그 자리에서 계속 노래를 이어 재생해요. 다시 극장 안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청중은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던 것이 사람이 아니라 축음기 기계였음을 알고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지요.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톤 테스트는 당시 청중에게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에디슨 다이아몬드 디스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크게 늘어났답니다.
1925년 빅터와 콜럼비아에 의해 본격적으로 상용화되기 시작한 전기녹음 기술이 음반 시장에 혁명을 가져왔는데도 불구하고, 에디슨은 끝까지 자신의 기계녹음 기술이 우월하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자신의 방식만을 주장했어요.
1927년 말, 이제 80세가 된 에디슨이 마침내 일선에서 물러나 아들 찰스 에디슨(Charles Edison)에게 회사의 경영권을 넘겨준 후에야 비로소 전기녹음 음반을 발매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다른 회사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늦어진 출발은 이미 무너져가는 에디슨 사를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1929년 12월 13일, 토마스 에디슨 축음기 주식회사는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답니다.
*사진 제목 및 출처
1. 다이아몬드 디스크와 리프로듀서/미국 개인소장(http://www.icollector.com/)
2. 에디슨 다이아몬드 디스크 C-250형/미국 개인소장(http://www.icollector.com/)
3. 초기의 에디슨 다이아몬드 디스크/미국 개인소장
4. 톤 테스트를 하고 있는 소프라노 프리다 헴펠. 1918년/위키피디아
5. 에디슨 장시간 레코드/영국 개인 소장(http://www.specialauctionservic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