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음기
녹음 기술의 혁명 | |
이름 | 전기 녹음과 오소포닉/비바토날 축음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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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축음기 |
연대 | 1925년 ~ 1948년 |
음성 파일 |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에밀 베를리너는 그라모폰을 발명하기 이전에 이미 마이크로폰을 발명했어요. 하지만, 당시의 기술로는 “멀리 있는 전화 수화기에서 나는 것 같은 흐릿하고 금속성의 소리” 정도밖에 담아 낼 수가 없었어요.
1923년, 시카고에 살던 무명의 발명가 올랜도 마쉬(Orlando Marsh)는 마이크로폰과 원시적인 회로장치를 결합해 마침내 상업적으로 가능성을 가진 최초의 전기녹음 음반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어요. 하지만, 당시까지 보급된 축음기는 전기 녹음 음반의 다양한 음역대를 제대로 재생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 무렵, 벨 전화기 회사의 협력업체 중 하나였던 웨스턴 일렉트릭(Western Electric)에서는 1923년부터 본격적인 전기녹음 실험에 돌입했어요. 그 연구원이었던 조지프 맥스필드(Joseph Maxfield)와 헨리 해리슨(Henry Harrison)은 그해 중반에 들어, 그때까지 만들어진 것보다 훨씬 더 우월한 녹음 시스템을 개발해 내는데 성공했어요. 이들이 고안해 낸 이른바 웨스턴 일렉트릭 시스템(Western Electric System) 녹음장비는 오늘날의 녹음 시설과 음향공학의 기초가 되는 것이랍니다.
1925년 1월, 빅터사와 콜럼비아사는 정식 계약을 통해 이 시스템을 도입하게 되지만, 전기 녹음 음반을 정확하게 재생할 수 있는 축음기를 아직까지 개발하지 못한 상태였어요. 이 두 회사가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사운드박스였어요. 그해 8월 말, 이들은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사운드박스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답니다. 그 다음으로 눈길을 돌린 것은 축음기의 내장 나팔이었어요. 빅터사는 웨스턴 일렉트릭 시스템으로 녹음된 전기 녹음을 제대로 재생하기 위해서는 나팔의 길이가 1.9미터 가량은 되어야한다고 판단했어요. 그러나 1.9미터의 나팔을 축음기 내부에 장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나팔을 특수한 모양으로 꼬아서 소리가 그 내부에서 크게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했어요. 이 축음기는 오소포닉(Orthophonic, ‘원음에 충실한’) 축음기라는 이름이 붙여졌어요. 오소포닉 축음기의 성공으로 인해 빅터사의 음반과 축음기판매는 한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답니다.
1926년 4월, 콜럼비아사 역시 전기녹음 음반을 제대로 재생할 수 있는 비바-토날(Viva-Tonal) 축음기라는 새로운 형태의 축음기를 만드는데 성공했어요. 비바-토날 축음기는 오소포닉 축음기에 비해 음질은 훨씬 떨어졌지만, 어쨌든 기존의 축음기에 비해서는 월등한 성능을 갖추고 있었지요. 1927년부터는 값싼 휴대용 축음기까지 비바-토날 형으로 만들게 되면서 콜럼비아사는 시장에서 다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어요.
1927년 초엽에 이르러서는 에디슨사를 제외한 미국과 유럽 내의 거의 모든 축음기 회사들과 음반회사들이 새로운 전기녹음 기술을 도입해 사용하게 되었답니다.
*사진 제목 및 출처
1. 시카고의 발명가 올랜도 마쉬가 자신이 개발한 전기녹음 장비로 전기 오르간 연주를 녹음하고 있는 모습. 1923년경
2. 축음기의 개량을 위한 음향실험을 하고 있는 조지프 맥스필드(왼쪽)과 헨리 해리슨(오른쪽)
3. 오소포닉 빅터 축음기/위키피디아
4. 기계식 녹음방식으로 녹음할 때의 빅터사 스튜디오에서의 녹음 광경(위)과 전기녹음 기술의 도입 이후 달라진 빅터 녹음 스튜디오의 모습(아래)/빅터 사
5. 빅터 빅트롤라 8-30 크레덴자/미국 개인 소장(eBay 출품 사진)
감수 : 석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