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제주도를 왕래하는 포구, 해남 이진진성 | |
이름 | 해남 이진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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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
분류 | 석성 |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1227 일대 |
일반설명
해남과 완도 사이에 형성된 좁은 수로의 해안가에 들어서 있다. 해안가의 평지부에 돌로 쌓아 수군들이 방어하던 진보(각 지방을 지키던 군사들이 주둔하던 작은 규모의 성)의 기능을 담당한 성이다.
1556년(명종 11) 7월에 이진의 권관 신종우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점으로 보아 그 이전에 수군의 권관진(조선시대 변방을 지키던 종9품의 가장 낮은 군사조직 단위)으로 처음 설치되었다고 여겨진다. 1556년(인조 5)에 만호진(조선시대 변방을 방어하는 종4품의 만호가 통솔하는 진)으로 승격하면서 성을 쌓았다.
성벽의 길이 약 940m, 너비 6m, 높이 4.5m이다. 부속 시설물로는 성문 3개, 옹성 3개 등이 있다.
축조과학
제주도를 왕래하는 주요한 포구로서 전남 서남해안과 육지를 잇는 군사·교통의 요충지에 입지하고 있다. 남쪽과 북쪽에는 낮은 산이 들어서 있어 높고, 중앙부가 낮은 말안장 형태의 지형에 자리잡고 있는 평산성으로서, 전체적인 형태는 타원형이다.
조선시대 영암군에 속한 수군진으로서 수군이 주둔하여 지키는 작은 성인 수군진보성 가운데에서는 가장 늦은 단계에 쌓아졌다. 이진진성 역시 다른 수군진보성과 마찬가지로 기초부에 성벽 등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터에 쌓은 돌인 지대석을 놓고 외벽은 쪼갠 돌을 거칠게 다듬은 할석으로 쌓고, 점차 위로 올라가면서 작은 돌로 쌓아 마감하고 있다. 면석 사이에는 잔돌을 끼워넣어 성돌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수평줄눈과 수직줄눈을 맞추지 않은 허튼층쌓기를 하였다. 내벽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도록 흙으로 쌓은 내탁식 구조로서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축성방식을 잘 따르고 있다. 위로부터 미치는 하중에 견딜 수 있도록 지대석을 놓고 10~20cm 가량 뒤로 물려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가면서 성돌의 크기를 달리하면서 성벽을 수직으로 쌓았다. 이렇게 하면 성벽으로 스며든 물이 자연스럽게 틈새를 통해 빠져나가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내벽은 아래쪽에 돌과 흙을 섞어 다져 쌓은 후 안쪽과 상부는 흙으로 다져 마감하였다. 성벽 위로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한 편리성과 함께 성벽의 붕괴 방지를 위한 안정성을 생각한 축조 방법이 적용된 것이다.
동·서·남문 등 3개소의 성문과 성문 앞에는 모두 반달모양의 옹성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으로부터 가장 취약한 성문을 보호하고 있다. 특히 이진진성의 경우는 남쪽과 동쪽 부분이 바다와 가까이 접하고 있는 입지조건으로 인하여 무엇보다도 성문의 방어가 가장 중요하다. 성문은 중앙부의 가장 낮은 부분에 설치하고 있다. 성문 앞의 옹성은 3개 모두 끝부분이 성벽과 평행하지 않고 바깥쪽(출입구)이 넓고 안쪽이 좁은 사각을 이루고 있어 16세기 중반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조선시대 변방을 지키는 군사시설에 쌓은 영진보성의 경우 일반적으로 네모서리 또는 모서리와 성문의 중간에 치를 두는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 이진진성은 지대가 높은 네 모서리에 4개의 치를 설치하여 적의 감시와 함께 전투를 벌일 때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다.
이진진성은 남쪽과 북쪽이 높고 가운데 부분이 낮은 지형상의 영향으로 성벽 밖에는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에 둘러 파서 만든 도랑)를 설치하고, 성안의 물이 낮은 중앙부를 통해 밖으로 배출하는 수구를 두었다.
수군의 방어시설인 진의 경우는 바다에서 왜구를 막는 임무가 가장 중요하였는데, 병선을 만들거나 수리하고, 배를 정박하는 선소시설이 동문 밖의 동쪽 해안가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