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우리나라르 대표하는 읍성, 나주읍성 | |
이름 | 나주 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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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고려 |
분류 | 석성 |
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시 성북동, 과원동, 서내동, 금남동, 남내동 |
일반설명
나주고을의 진산인 금성산을 배경으로 앞으로는 영산강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에 쌓은 평지 읍성이다.
고려시대 왜구방어를 위해 나주목의 읍치에 흙을 다져 쌓는 고도의 기술인 판축기법으로 쌓은 토성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4년(태종 4) 10월에 돌을 이용한 석축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1456년(세조 5)에 지금의 규모로 크게 확장하였다.
성벽의 길이는 약 3.53km, 너비 6m이다. 부속 시설물로는 고려-조선시대의 성문 4개, 옹성 4개, 치 7개, 수문 2개와 행정을 맡아 보는 객사 및 동헌 등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축조과학
나주읍성은 오랜 전통과 역사성을 가진 읍성으로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주읍성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북벽 및 남동벽의 일부 구간만 구릉을 이용하고 대부분은 평지를 가로질러 쌓은 평지성으로서, 전체적인 형태는 남북으로 긴 타원형에 가깝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맞추어 쌓았기 때문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읍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나주읍성은 고려시대 중심토루 양쪽에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다져 판축하는 9세기 이후 통일신라시대의 토성 축조기술을 이어받아 처음 쌓아진 판축토성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4년(태종 4) 10월에 읍성을 고쳐 쌓으면서 돌로 축조하여 토성에서 석성으로 변화하였다. 축성재료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들어 최초로 바다를 끼고 있는 고을에 쌓은 연해읍성이라는데 의의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나주는 고려시대의 지방 중심도시인 8목 가운데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도 경제ㆍ문화ㆍ군사의 중심지인 목으로 ‘목사골’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면서 군사적인 거점인 동시에 지방통치의 핵심을 이룬 곳이다. 나주읍성은 이러한 고을의 위상에 걸맞게 도시계획에 의해 쌓아졌다. 성내의 도로는 4개의 성문을 잇는 십자형의 도로망을 갖추고 있다.
조선시대 읍성은 《축성신도》라는 성을 쌓는 공사과정을 꼼꼼히 적은 문서에 의해 규격화와 표준화된 축조방식으로 쌓아졌다. 나주읍성 역시 성의 기초가 되는 부분에 지대석을 놓고 외벽은 바깥면만 거칠게 다듬은 쪼개진 돌로 쌓고, 점차 위로 올라가면서 작은 돌로 쌓아 마감하고 있다. 면석 사이에는 잔돌로 성돌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수평줄눈과 수직줄눈을 맞추지 않은 허튼층쌓기를 하였다. 외벽은 돌로 쌓고 내벽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도록 흙으로 쌓은 내탁식 구조로서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축성방식을 잘 따르고 있다. 그러나 기초는 현지 지형에 맞게 다양한 수법이 적용되었다. 나주읍성은 금성산성에서 발원한 학교천의 물줄기가 읍성의 남서벽을 통해 유입된 후 동남벽으로 빠져 나가기 때문에 물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지형적인 특성이 지닌 곳이었다. 따라서 물의 영향을 많이 받는 성벽 구간은 주먹돌과 그 보다 작은 돌을 진흙과 섞어 성벽 바깥 2m 범위까지 촘촘하게 다져서 기초를 튼튼하게 처리하였다. 그런 다음 위로부터 전달되는 하중에 견딜 수 있도록 지대석을 놓고 10~26cm 가량 뒤로 물려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가면서 성돌의 크기를 달리하면서 성벽을 수직으로 쌓았다. 성벽으로 스며든 물이 자연스럽게 틈새를 통해 빠져나가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 축조기법이다. 내벽은 아래쪽에 돌과 흙을 섞어 6m 가량을 다져 쌓은 후 기존에 있었던 토성부분을 경사지게 다듬고 잔디를 입혀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마감하였다. 성벽 위로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편리성과 함께 성벽의 붕괴 방지를 위한 방법이 적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