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해전에 약한 몽골군을 대비한 진도 용장성 | |
이름 | 진도 용장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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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고려 |
분류 | 석성 |
소재지 |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106 일대, 군내면 용장리, 고군면 벽파, 유교, 오류리 일대 |
일반설명
용장성은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군사기구였던 삼별초가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세우고 몽고에 항복한 고려와 몽고 연합군을 상대로 항쟁의 거점으로 쌓은 도성이다. 왕궁을 감싸고 있는 토성과 외곽의 나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성은 강화도로 도성을 옮기고 몽고를 상대로 항쟁을 펼치던 1243년(고종 30)에 해전에 약한 몽고군에 대비하기 위해 섬 지역에 처음 산성이 세워지면서 방어용으로 활용되다가 삼별초가 왕을 세우고 진도에 도성을 건설하면서 나성으로 사용되었다. 내성은 1270년(원종 11) 8월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내성의 길이는 425m, 높이 1.5~2m이며 부속 시설물로는 건물지 50개소 등의 유구와 기와·청자·금속류 등 많은 유물이 확인되었다. 외성 길이는 13Km, 높이 1m 전후, 너비 약 320cm이며, 내부 면적은 8,514,000㎡(258만평)이다. 부속 시설물로는 성문 6개소, 적대 1개소, 치 3개소, 장대, 제사유적 등 많은 유구와 기와·청자·금속류 등 많은 유물이 확인되었다.
축조과학
내성은 중심부에 높이 1m, 너비 1m 가량의 돌을 쌓고 그 안팎과 위에 흙을 다져 쌓은 석심토축성이다. 육지와 통행을 위한 관문으로 사용하였던 벽파진으로부터 가장 먼 남쪽 성벽의 바로 아래쪽 골짜기에 들어서 있다. 선황산과 왕궁지 서쪽 산줄기가 이·삼중으로 가리고 있어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방어에 목적을 두고 입지가 선정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으로 구획된 내부공간은 18단의 계단식으로 정지하여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왕의 거주 공간(A지구)과 회랑(B지구), 제사 공간(P지구), 숙소용 공간(K·L지구), 음식조리 공간(H지구) 등 용도별로 배치한 각종 건물 50여 개소(2013년 기준)가 조사되었다. 각각의 건물지와 단은 중앙에 마련한 통행로를 통해 오르내리도록 설계하였으며, 남-북방향과 동-서방향으로 배수가 되도록 체계적인 배수로를 갖추고 있다. 이 같은 지형조건과 건물의 배치 형태 및 형식은 고려의 도성이었던 개성 만월대와 공통점을 보이면서도, 삼별초가 세운 정부 나름대로의 특색을 살려 건설한 도성으로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기단 및 초석으로 사용된 석재의 채석과 운반 및 가공(거친 다듬), 건축용 목재의 벌채와 운반 및 건조, 막새 및 평기와 등의 지붕재료에 소요되는 기와의 생산과 조달 등 일련의 건축 과정과 체계적인 배수시설 및 축대 등을 고려하면, 역사기록과는 달리 철저한 사전기획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오기 2~3년 전에는 착공하여 진도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이들 시설이 완공되어 있었거나 거의 완공단계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외성은 바닷물이 육지 쪽으로 들어와 만을 이룬 북벽과 서벽의 일부 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의 산 능선을 따라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쌓았다. 만을 이루고 있는 만입지는 밀물 때는 물이 들어오지만 썰물 때는 수심이 낮거나 갯벌 바닥이 드러나 선박이 통행할 수 없는 조간대 지형을 이루고 있어 성벽을 쌓지 않아도 충분한 방어력을 갖는 지형적인 특성을 지닌 곳이다. 총 길이 18km 가운데 만입지를 제외한 13km에 걸쳐 안팎을 돌로 쌓는 방식인 협축법으로 쌓은 초대형 석축 산성이다. 성벽의 길이가 긴만큼 성벽의 구조 역시 지형조건과 성벽 축조에 사용될 석재의 분포여부, 축성 집단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구조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