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풍부한 수원과 넓은 활동공간을 갖고 있는 금성산성 | |
이름 | 담양 금성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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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고려 |
분류 | 석성 |
소재지 |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 용면 산성리 일원 |
일반설명
금성산성은 해발 603m되는 산성산을 주봉으로 하고 북동쪽에 시루봉(525.5m), 남서쪽에 노적봉(439.0m), 서쪽에 철마봉(484.4m) 등으로 이어진 가파른 능선과 깎아지른 암벽을 이용하여 골짜기를 포함하여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광주리처럼 가장자리가 높고 중앙이 낮은 고로봉의 지형에 쌓아 풍부한 물과 넓은 활동공간을 갖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13세기 중반 무렵의 고려 말에 처음 쌓았으며, 태종 10년(1440)에 고쳐 쌓았다. 그 후 세종 16년 무렵에 폐기되었다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다시 수축하여 사용된 이래, 광해군 2년(1610)에 외성 개축, 광해군 14년(1622)에 내성에 대장청 등 건물을 세우고, 효종 4년(1653)에 내성을 수축하는 등 여러 번 수리와 개축을 거듭하면서 1895년까지 사용하였다.
산성의 전체 길이는 7,345m로서 외성 6,486m, 내성 859m이며 이중 150m는 외성과 성벽이 겹친다. 면적은 외성이 1,197,478㎡(362,237평), 내성이 54,474㎡(16,478평)이다. 부속 시설물로 성문 6개소, 여장, 치, 장대, 수구 2개소, 사찰을 포함한 건물지 12개소 등의 유구와 기와조각, 자기조각 등의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축조과학
금성산성은 외적이 쳐들어 왔을 때 주변의 여러 고을 사람들과 군인들이 식량과 생활도구 등을 챙겨 산성 안으로 들어가 적들이 물러갈 때까지 주둔하면서 방어하는 산성이다. 이를 입보산성이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내부공간과 풍부한 식수원과 식량 등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 등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금성산성은 가파른 능선과 암벽으로 둘러 쌓여있으며 서쪽으로 골짜기를 끼고 있는 산성의 내부는 수천 명이 생활하고도 남을 만큼 풍부한 물과 넓은 활동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내성에는 동헌, 내아, 삼문, 화약고, 진리청, 승대장청, 연환고, 소금과 간장을 보관하는 창고 등 중요 건물과 성안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민가까지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금성산성의 특징 중의 하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성돌은 산성 주변의 자연 암반에서 떼어낸 수성암 계통의 석재를 판자모양으로 거칠게 다듬어 경사가 가파른 사면부와 능선 정상부는 외벽만 성돌로 쌓는 편축식으로 쌓고, 성문 부근은 내·외벽을 모두 성돌로 쌓는 협축식으로 쌓아 지형조건에 맞춘 축성법을 적용하고 있다. 암벽이 있을 경우에는 성돌과 자연스럽게 접합되도록 처리하고 그 위 부분에는 성돌을 쌓지 않았고, 성벽이 지나가는 구간의 높낮이 차이가 큰 점을 고려하여 경사면에 맞추어 잔돌로 고정시켜 가며 수평쌓기를 하였다. 일반적으로 성벽 밑부분에서 상단까지는 높이가 일정하지만, 금성산성은 성벽 상단을 계단식으로 마무리하여 높이가 일정하지 않은 점이 특징이다.
위·아래의 구분 없이 일정한 크기의 성돌을 사용하여 잔돌로 고정시켜 가며 수평쌓기를 한 점도 다른 성곽과 차별을 보이는 부분이다. 고려시대 이후의 성벽은 지대석을 놓고 아래쪽에 큰 돌,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석재로 쌓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금성산성은 지대석 위에 일정한 크기의 성돌만으로 쌓았다. 험준한 지형에 맞추어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 안정적인 구조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적절한 축성법을 적용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