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영산강을 끼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잡은 회진성 | |
이름 | 나주 회진토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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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통일신라 |
분류 | 토성 |
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산8-1 일원 |
일반설명
회진리 사직마을 북서쪽의 해발 159.2m의 거마산 정상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남쪽을 향해 뻗어 내린 능선과 평지의 계곡부를 가로질러 쌓은 포곡식의 평산성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 16년(757) 행정개편 때 백제의 두힐현에서 회진현으로 이름을 바꾼 후 회진현을 다스리기 위한 중심성곽(치소)으로 처음 쌓았으며, 고려시대까지 사용하였다.
성벽의 길이 2,400m, 너비 14m로서 동서 직선거리 740m, 남북 직선거리 810m이다. 영산강유역의 토성 가운데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부속시설물로는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성문지 4개소와 성벽을 오르내리는 등성시설 3개소, 성안의 물을 배출시키기 위한 수구 등의 유구와 기와류, 토기류, 자기류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축조과학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성곽의 입지 변화와 성곽 규모의 대형화, 축조기법의 발전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 성곽이 들어선 입지의 변화이다. 회진성은 서해바다와 전남 내륙지역을 연결하는 주요한 길목인 영산강을 끼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회진성에서는 주변지역이 잘 바라다 보이지만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장점을 지닌 곳이다. 백제시대에는 고을을 다스리기 위한 중심성곽을 산성에 두었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산과 평지를 아우르는 곳이나 평지에 두었다. 이처럼 새로운 입지의 선택은 전 시기에 비해 방어력과 함께 교통의 편리함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회진성은 판축기법으로 쌓은 토성이다. 판축기법은 토성의 축조법 가운데 가장 뛰어난 축조기술로서 많은 인력 및 자원을 필요로 한다. 먼저 지반을 정리한 후 일정한 간격으로 구획을 나누고, 짜 맞춘 나무틀(판목틀)이 밀려나지 않도록 나무 기둥으로 받치고 그 안에 점토와 모래 등을 넣은 후 달고(공이)라는 도구를 이용, 켜켜이 다져 성벽을 완성하는 공법을 일컫는다.
회진성 평지구간의 경우는 중심 토루 내·외면의 기초부에 2단으로 돌을 깔고 그 위에 나무기둥(영정주)과 보조 기둥으로 받친 판목틀 안에 점토와 풍화암반토를 5~10㎝ 두께로 얇게 펴서 켜켜이 다져 쌓았다. 기초부에 담장처럼 돌을 깐 시설을 기저부 석열이라 하는데 빗물이 성벽 밑 부분으로 스며들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고, 성벽 상부로부터 미치는 하중을 견디기 위한 기초부의 구조물이다. 중심 토루 양쪽에 기저부 석열을 깔고 그 위에 켜켜이 다져 쌓는 판축기법은 8세기 중반 무렵의 회진성 축조에 처음으로 적용한 최신 공법이었다. 또한 320~340cm 간격으로 구획하여 구릉 방향으로 3°정도 경사지게 올라가다가 나무기둥(영정주)을 경계로 계단상으로 쌓아 백제시대 판축 토성에 비해 2배 이상 성벽을 길게 쌓았다. 그 결과 예전에 비해 성벽의 너비는 좁아진 반면에 단위당 축조 길이는 2배 이상 길게 성벽을 쌓음으로서 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토성을 쌓는 기술의 발전을 이루었다. 능선구간의 경우는 바깥쪽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깎아내고 평지구간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판축하였는데 다만 중심 토루의 안팎에 깐 기저부 석열이 안쪽이 높고, 바깥쪽이 낮게 놓여있다. 지형에 맞게 축성 기술을 달리 적용한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내피 토루에 돌로 덧댄 방어벽 중간에는 일정 간격으로 계단을 만들어 재빨리 토성 위로 올라가 방어할 수 있는 등성시설을 마련하였다. 성벽을 보호하면서도 방어에도 힘쓴 시설물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