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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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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심장, 한양도성
이름 서울 한양도성
시대 조선
분류 석성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산1-3외
서울 한양도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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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일반설명
한양도성(사적 제 10호)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 도성이다. 성은 백악·인왕·목멱(남산)·낙산을 연결하여 쌓았으며 전체 둘레는 18,127m이다. 태조는 지금의 서울인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년)에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여 한양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1396년 1월부터 시작한 축성공사에 동원된 인원 총 118,049명에 달하는데 이는 당시 총구인구의 4%에 육박하는 인원이었다.
태조 때는 성은 높고 험한 곳은 돌로 쌓고, 낮고 평탄한 곳은 흙으로 쌓아 석축과 토축이 뒤섞여 있었는데, 세종 대에 이르러 모두 석축으로 바꾸어 쌓았다. 한양성곽 안에는 조선시대 궁궐, 종묘, 사직 등의 왕실건물을 비롯하여 육조 등의 관청건물, 양반과 서민들의 주거지가 정해진 위치에 세워졌다. 출입시설인 남대문과 동대문은 각각 국보·보물 제 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양도성을 쌓을 때 총 97구간으로 나누어 2개의 구간마다 관리 12명을 배치하여 감독하게 했으며,  1구간을 다시 6호로 나누어 책임을 분리시키는 등 세밀한 계획을 세워 공사를 진행했다. 첫 구간은 천자문의 ‘천(天)’으로 시작하여 97번째인 ‘적(吊)’으로 끝나고 있다.

축조과학
성벽은 세종, 광해군, 숙종, 영조 대에 대대적으로 성벽을 고쳐 쌓았다. 세종 때에는 큰 돌로 아랫부분을 쌓고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게 쌓았다. 또한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숙종 때는 정사각형의 돌로 가지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을 이루었다. 이러한 축조기술은 지방의 읍성과 산성축조의 모범이 되었다.
한양도성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어,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600여 년간 조선왕조를 수호하던 한양도성은 개화기에 국력이 쇠퇴함에 따라 그 기능을 점차 상실해 갔으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람들의 지혜와 합리성으로 빚어낸 한양도성의 가치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우리나라의 심장으로써 자리매김 하고 있다. 현재에도 한양도성은 전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물게 도성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11월 23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감수 : 백종오 박사
안내
상기 내용은 2015년 전문가 감수를 받아 제작된 자료로 최신내용과 상이할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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