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정조가 꿈꾼 새로운 조선, 화성 | |
이름 | 수원 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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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
분류 | 전축성 |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 |
일반설명
수원 화성(사적 제 3호)은 팔달산과 그 동쪽의 낮은 구릉과 평지를 감싸며 쌓은 평산성(평지와 산을 이어서 쌓은 성)으로 타원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의 전체둘레는 5,744km이고 높이는 4.9~6.2m이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마련하게 위해 신도시 화성을 계획하게 되었다. 수원 화성은 당시의 최첨단 과학과 건축술이 빗어낸 역작으로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화성 건설에 관한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에 모두 담겨 있다.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한국의 세계적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수원 화성의 그 방대한 공사를 2년 9개월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다산 정약용이라는 젊은 실학자의 역할이 컸다. 그는 화성의 설계를 맡아 전통적인 방법을 기초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여러 서양의 건축을 참고하였다. 화성은 정약용의 설계를 바탕으로 채제공을 비롯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와 같은 유능한 실학자들의 젊은 패기와 기중기, 녹로와 같은 과학기술이 접목되어 만들어졌다. 당시 건설된 주요시설물로는 문루와 옹성을 갖춘 4대문과 행궁, 암문, 수문, 연못, 장대, 공심돈, 각루, 포루, 봉돈, 궁대, 치성, 용도, 적대 등 48개소이다.
축조과학
수원 화성은 그 계획부터가 새로웠다. 정약용은 화성을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평지이면서도 견고한 성을 쌓았다. 도시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행궁과 ‘十’자로 잘 뻗은 신작로는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한 상업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성벽은 지형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하였으며 효율적 방어가 가능하게 옹성, 장대, 봉수대, 포루, 각루 등 성벽을 따라 40여개의 방어 시설물을 배치하였다. 또 당시의 전투는 화력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성벽위의 여장(성 위에 낮게 쌓은 담) 곳곳에 총구멍(총안)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했었다.
당시 화성 건설에서 근대적 과학정신이 표현된 것은 거중기이다. 거중기는 정약용의 독창적인 설계로 만든 것으로 무거운 물건을 작은 힘으로도 들어 올릴 수 있게 만든 기계장치이다.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이라는 책을 참고하여 개발했는데, 정약용의 거중기는 중국의 것보다 4배 정도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화성 건설에 사용된 거중기는 모두 11대로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이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성벽은 화강암뿐만 아니라 벽돌이라는 흙으로 만든 신소재가 함께 사용되었다. 벽돌과 석회를 섞어 성벽을 쌓으면 화포의 강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어 당시 화력을 바탕으로 한 전투에서 효과적인 방어를 할 수 있었다. 이에 화성 축조이후, 벽돌을 사용한 성벽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