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난공불락의 백제성, 부여 가림성 | |
이름 | 부여 가림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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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백제 |
분류 | 석성 |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 1-1번지 |
일반설명
가림성(사적 제 4호)은 해발 250m의 성흥산 정상부를 감싸고 쌓은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으로 돌을 이용해 쌓아 올렸다. 산 정상에 오르면 주변에 높은 봉우리가 없어 사방이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사비도성을 수호하기 위해 금강 하류에 쌓은 성으로 당시 상위관직인 위사좌평을 성주로 삼았다는 것에서도 이 성의 중요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이 가림성을 동성왕 23(501)년에 축조했다는 명확한 연대를 적고 있어 고대사 연구에 큰 단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
가림성은 성흥산 정상부에 그 주변 지형을 따라 쌓았기 때문에 긴 네모 형태를 보이며 전체 둘레는 1,200m에 달한다. 발굴조사를 거쳐 성문과 건물터, 우물 등이 확인되었으며,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가 ‘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기 어렵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난공불락의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림성은 백제부응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다.
축조과학
성벽은 3~4m정도의 높이로 남아있는데, 성돌로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성벽은 밖에서 보이는 외벽 부분만 정연하게 쌓는 편축식을 사용했고, 성돌은 가로로 길게 네모진 돌을 사용하여 한 단, 한 단 수평이 맞게 올리는 바른층쌓기를 했다. 그러나 성문 주변은 특별히 안쪽과 외쪽을 모두 고르게 쌓아 올리는 협축식을 사용했다.
백제는 초기부터 많은 성을 쌓았는데, 성을 쌓는 재료도 흙을 사용한 토성과 돌을 사용한 석성을 모두 능수능란하게 만들 줄 아는 우수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기술은 백제멸망 이후 백제인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같이 전파가 되었는데, 특히 일본 규슈에 백제유민들이 만든 일명 조선식 성에 고스란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