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중원에 백제가 남긴, 장미산성 | |
이름 | 충주 장미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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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백제 |
분류 | 석성 |
소재지 |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산77-1외 |
일반설명
장미산성(사적 제 400호)은 충주시 북서쪽에 자리한 장미산의 능선과 계곡부를 감싸는 포곡식 산성으로 돌로 쌓아올렸다. 보련과 장미라는 남매가 성 쌓기 내기를 했는데, 남동생인 장미가 이기게 되어 그 이름을 따 장미산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산의 정상부에 오르면 남쪽과 동쪽으로는 한강과 합류하는 달천이 한눈에 보이며 서쪽과 동북쪽으로는 고갯길들이 쉽게 볼 수 있다. 주변에는 충주고구려비와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을 비롯한 충주 누암리 고분군 등이 있어 삼국간의 치열한 싸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장미산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모습을 보이는데, 그 모양에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전체 2,040m에 이르는 웅장한 성벽을 통해, 장미산성이 옛 중원지역에서 가졌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여러 차례의 조사결과 성벽과 치성, 배수로, 공격용 돌을 보관한 석곽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4세기 이후의 한성백제토기이다.
축조과학
장미산성의 성벽은 흙을 다져 올리고 나서 그 위에 돌로 쌓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돌을 사용하여 쌓아 올렸다. 성벽은 성벽을 축조할 곳에 계단과 같은 모양으로 암반을 정리하여 맨 아랫 기단부터 쌓아올렸다.
안쪽으로 양쪽 끝을 뾰족하게 다듬은 형태의 북돌을 넣고 빈틈에는 작은 돌들을 채워 올리다가 지형의 안과 밖이 수평이 되는 지점부터 내벽과 외벽을 동시에 쌓아올리면서 그 사이에는 다시 북돌을 가지런히 채워 넣었다. 이러한 성벽 쌓기 방법은 외벽이 붕괴되어도 내부의 북돌이 견고하게 남게 되어 성벽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또한, 성벽 안쪽에 빈 공간에는 찰진 흙으로 다져 넣어 누수로 인한 성벽의 붕괴 가능성을 낮추었다.
백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성을 건축했던 많은 경험을 통해 인문 지리적 요소에 맞는 성 쌓기 기술을 익혔다. 그 축적된 기술이 장미산성을 통해 삼국의 각축장으로 대변되는 중원지역에서 발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