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고려 대몽항쟁의 상징, 강화 중성 | |
이름 | 강화 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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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고려 |
분류 | 토성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일원 |
일반설명
강화 중성은 행정구역상 강화읍의 월곶리, 대산리, 관청리, 선원면의 선생리, 창리, 신정리 등 1읍 1면 7리를 통과하며 북쪽으로 북장대에서 옥림리의 옥창돈대까지 약 1.8km, 남쪽으로 남장대에서 가리산돈대와 갑곶돈대 사이 외성의 한 지점까지 약 6.3km로서 총길이는 약 8.1km에 달하는 토성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고려가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이후 2차 침입이 이루어지기 직전 고종 19년(1232) 6월에 개경에서 강화로 도읍을 옮기며 내성, 외성과 함께 고종 37년(1250)에 강화 중성이 축조되었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강화도의 성을 헐게 되는데 내성과 외성의 폐기관련 기사는 당시의 상황까지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중성에 대한 폐기와 관련된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며 때문에 중성의 경우는 내성·외성과 같이 성벽을 허무는 과정 없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강화 성벽에 대한 조사 결과 강화중성은 판축기법으로 축조된 토성으로 중심 판축토루와 이를 덮고 있는 내·외피토루로 이루어 진 것이 확인되었다. 이와 관련된 시설로는 판축토루 하단의 기단석축렬과, 와적층, 성내 수로 시설 등이 확인되었으며 중심 판축토루를 축조하기 위한 영정주 및 목주흔, 횡판목과 종판목흔과 같은 판축틀의 흔적이 확인되어 고려 말 토성 축조 방법에 대한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축조과학
강화 중성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축조된 성곽이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 견고한 성벽을 축조할 수 있는 축조공법이 적용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강화 중성은 기본적으로 기초 부분에 기단석축을 배치하고 중심토루와 내외피토루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기저부의 기단석축열은 지형의 경사도에 따라 내·외측 석축열 간 높이차를 다르게 하였으며 평면형태에 있어 바깥 면은 ‘一’, 안쪽 면은 물결형태로 조성하였다.
판목시설의 목주는 영정주와 보조목으로 구분되며 영정주는 판목의 결구, 보조목은 판목의 고정하는 역할을 했다. 판목은 횡판목과 종판목이 확인되었으며 직사각형의 판목 여러 개를 겹쳐서 벽면을 조성하였다. 종판목의 경우 2차 공정에서만 확인되며 희생목 또는 내구성과 작업성의 강화를 위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심토루는 주변의 흙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기초 부분의 경우는 별도로 정선한 석비레를 이용하여 단단하게 쌓았으며 나머지 구간의 경우 다짐강도와 물을 조절하여 교차판축의 효과를 나타내도록 쌓았다. 강화 중성에서 확인된 기단석축렬 및 판목시설들의 특징들은 이전시기 판축토성에 비해 작업성을 높이기 위해 기술적으로 발달된 형태라고 판단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