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성곽 축조 정보를 기록한 명문이 있는 신대리성 | |
이름 | 울산 신대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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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통일신라 |
분류 | 석성 |
소재지 | 울산광역시 북구 양남면 신대리 |
일반설명
신대리성은 관문성이 끝나는 곳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해발 590m인 동대산 정상에 있는 길이 약 1.8km의 타원형 성이다. 〈청구도〉나 〈대동여지도〉에 ‘대재’의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원래의 이름은 대재성으로 기박산성이라고도 불린다. 동해안 일대와 남쪽의 울산, 그리고 서쪽 모화리 일대를 동시에 관망할 수 있는 곳으로 동해안으로 침입하는 왜병들로부터 신라 왕경을 수비하는 전초적인 군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문무왕 13년(673년) 9월에 쌓은 북형산성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관문성보다 먼저인 7세기 후반에 축조한 것으로 동해안 방어의 전초적인 기지이다. 기록상으로 조선시대까지도 계속하여 사용되었고 후대에 보수한 흔적도 보이지만 원 성벽은 대체로 잘 남아있다.
성벽 바깥 성돌에서 10개의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성을 축조하면서 거칠산군(동래), 압독군(경산), 신라의 수도인 금경(경주), 절야화군(영천), 퇴화군(흥해), 서랑군(울산) 등 6곳의 주민들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약 150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내의 시설물로 동문지, 남문지, 서문지, 북문지가 있다. 현재의 남문지는 너비 약 2m, 높이 1m 정도로 고려시대 혹은 조선시대에 와서 통일신라시대의 성벽을 허물고 쌓은 것이다. 남문지에 인접한 곳과 그 서쪽에서 건물터가 있으며 통일신라 전반기부터 고려 초의 기와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동북쪽 산정부에도 망대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있는데 통일신라시대 기와조각들이 다량 흩어져 있었다. 수구가 3곳에서 확인되는데, 남문지 동북쪽 350m 정도 지점의 수구의 경우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는 정사각형으로 가로 32㎝, 세로 35㎝ 크기이다. 그 밖에 남문지 인근에 지름 3.2m의 비교적 크고 둥근 우물자리가 남아 있다.
축조과학
성벽은 사각형에 가까운 성돌로 줄눈쌓기하였으며 아래 성돌을 기준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약간씩 들여쌓는 퇴물림방식으로 성벽을 안정되게 쌓았다. 명문(돌 등에 새겨 놓은 글)은 남문지를 주변에서 동쪽 수구 사이에서 10개가 발견되었는데 이 성을 처음 쌓은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명문은 성벽을 다듬지 않고 자연적인 표면에 새겼는데 하나의 내용을 두 개의 인접한 돌에 새기기도 했다.
명문의 내용은 각 군현이 담당한 축조 구역의 북쪽 경계인 북계와 남쪽 경계인 남계, 그리고 담당 구역의 길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명문을 통하여 볼 때 당시 성곽을 축조할 때 한 고을에서만 쌓는 것이 아니라 인근의 여러 고을에서 사람들이 동원되어 정해진 거리를 쌓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성의 축조에 지방민들이 동원되어 일정한 양을 할당받아 부역하는 사례를 보여주는 사례로 경주의 남산신성비와 경주 술오작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