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강과 바다를 접하고 있는 서생포왜성 | |
이름 | 울산 서생포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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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
분류 | 석성 |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리 711번지 일원 |
일반설명
조선시대 서생포지역은 경상도의 경주, 안동, 문경 방면으로 진군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강과 바다를 접하고 있어 경상좌수영 휘하의 서생포만호진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서생포왜성(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 8호)은 임진왜란 때 서생포진성이 함락된 후 그 인근에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10만 명을 동원하여 선조 25년(1592년) 7월부터 선조 26(1593)년에 걸쳐 완성한 성이다. 선조 27년(1594년)에서 선조 30년(1597년) 사이에는 사명대사가 4차례에 걸쳐 이곳에서 카토 기요마사와 담판을 벌였던 곳이다. 이때, 일본군의 무리한 요구로 협상이 결렬되어 정유재란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벽이 길이 2.5km에 이르는 거대한 석성으로 진하 앞바다를 바라보는 해발 209m 높이의 산 정상에서부터 산 아래 쪽으로 크게 제1곽, 제2곽, 제3곽을 차례로 쌓았다. 그 외곽에는 약 60~70도의 기울기를 가지는 경사지 석축성벽이 산 아래 공간까지 약 300m 정도 길게 이어져 있으며, 성벽 바깥에는 해자 등을 배치하여 적의 접근을 어렵게 하였다.
성벽은 현무암제의 자연석을 깨뜨려 만든 작은 돌을 끼워가며 줄눈 흐트려쌓기 했다. 성벽의 모퉁이에는 긴 성돌을 엇갈려쌓기하거나 성돌을 세워쌓기하였는데 성벽의 높이는 6~8m 정도이다. 성내 가장 아래 지역인 제3곽은 마을이 조성되면서 거의 허물어졌으나 동쪽의 구릉지에는 높이 약 10m에 이르는 2단의 석축성벽이 양호하게 남아 있다. 성문터에는 성벽을 폐쇄하거나 고친 흔적이 있으며 북서쪽 장수의 지휘소인 장대터 북측에는 장군수라 불리는 우물터가 남아있다.
축조과학
서생포왜성은 수송 연락관계를 고려하여 선박출입이 편리한 북동쪽의 회야강과 진하 앞바다를 이용하면서 부근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구릉을 피하여 독립된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 서생포왜성은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성벽은 복잡한 배치를 이루며 3단으로 구성되어 있어 방어상 이상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특히, 성문은 성 안이 노출되지 않도록 들어가는 입구를 꺾어지거나 성벽을 돌출되게 설계하였다.
성벽의 기본적인 수법은 성돌 안쪽 1~2m정도는 배수의 역할을 하도록 잔돌을 채워 빗물의 압력으로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고, 그 안쪽은 흙으로 단단히 다져 석축을 견고히 하고 있다. 이러한 성벽은 성돌 안쪽을 전부 돌로 채우는 것보다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또한, 성벽은 기본적으로 60~70도 정도 경사지게 쌓아 성돌의 무게 중심을 분산시켜 성벽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