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국내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산성, 금정산성 | |
이름 | 부산 금정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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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
분류 | 석성 |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일대 |
일반설명
금정산성(사적 제 215호)은 해발 801m 인 금정산 꼭대기에서 동남쪽, 서남쪽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축성되었다. 둘레 18,845m로 국내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산성이다. 숙종 대인 1701~1703년 사이에 쌓은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1707년 동래 부사 한배하가 성이 너무 넓어 남북 두 구역으로 구분하는 중성을 쌓고 장대, 군기고 등의 시설을 보완하였다. 1806년 동래 부사 오한원이 성을 다시 수리하고 동문을 새로 쌓았으며, 서문, 남문, 북문에 문루(성문의 바깥쪽 위에 지은 다락집)를 만들고 수비군을 배치하였다.
산성의 수비는 동래 부사가 맡았으며, 전쟁이나 변란이 발생하면 동래, 양산, 기장의 각 읍 소속군과 사찰의 승려들이 차출되어 방어토록 하였다. 특히, 승병은 숙종 39년(1713년) 판결사 이정신의 건의에 따라 동래, 양산, 기장의 3읍에 있는 승려 수천 명으로 대를 편성하고 유사시에는 이들을 모아 산성 방어에 임하도록 조치하였다. 평상시에도 산성 내에 있었던 국청사와 해월사의 승려 100여명과 범어사의 승려 300명으로 수비했다.
조선 숙종 33년(1707년) 동래부사 한배하가 중성을 축성하면서 좌기청, 내동헌 등의 관아건물 및 장대, 중군소, 교련청, 군기고, 화약고, 승장소, 산성창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금정산성의 수비 및 관리를 맡은 금정진은 남북으로 비교적 급한 경사를 이루는 지형을 3단으로 단이 지게 조성하고 각 단마다 건물을 배치하였다. 숙종 이래로 산성의 수리공사의 내용을 비석에 새긴 ’금정산성부설비‘가 남아 있다.
축조과학
금정산성을 축조하는데 있어 성돌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노천의 화강암반에서 떼어 낸 깬 돌을 사용하였다. 성벽은 기본적으로 외벽에서 110~210cm 안쪽까지 돌로 쌓았고 그 안쪽으로는 흙으로 채워 외벽만 돌로 쌓는 내탁식 성벽이다. 성벽의 너비는 대체로 350cm 내외이며, 성벽의 높이는 곳에 따라 다른데 기초에서 여장의 기초석인 미석까지는 150㎝, 180cm, 210cm이다. 미석은 두께 10cm 내외의 판석을 사용하였으며 성벽에서 20cm 정도 내어 설치하였다. 성벽 위에 설치하는 여장의 경우 대체로 높이 20~80cm 정도 남아 있는데 성벽의 원래 높이는 3m 전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평지보다 높직하고 평평한 땅인 돈대로 추정되는 제3 망루 남쪽과 일부구간에서는 여장 내에서 총안이 확인되었다.
성벽을 쌓은 수법은 기초 부분에서 위쪽으로 150cm 정도까지는 대형의 석재로, 그 위쪽으로는 비교적 얇은 성돌에 잔돌을 끼워 가로, 세로 줄눈이 일정하지 않게 쌓는 허튼층쌓기 공법으로 쌓았다. 경사지에서는 2~3m 구간마다 계단식으로 축대를 덧붙이 듯 성벽을 쌓아 성벽의 무게가 아래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하였다. 부분적으로 빗물침투로 인한 성벽유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성문 주변이나 경사지에서는 내벽의 안쪽을 따라 너비 약 5m~15m, 깊이 5m 정도 규모로 ‘V’자 형태의 구를 조성하여 자연 배수가 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