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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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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방어를 위한 투척용 석탄(石彈)이 발견된 웅천읍성
이름 웅천 읍성
시대 조선
분류 석성
소재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읍 성내동 일대
웅천 읍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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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일반설명
웅천읍성(경상남도 기념물 제 153호)은 북쪽의 봉동산과 자마산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산에 의해 가려진 분지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남북방향으로 긴 직사각형의 평지성이다. 세종 16년(1434년)에 처음 축조되었으며, 단종 1년(1452년)에 원 성벽에 붙여 더 넓게 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웅천읍성의 동벽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덧붙여 쌓은 동문지 아래에서 원 성벽의 남쪽 외곽에 서쪽으로 굽어진 해자를 확인하였다. 단종 1년(1452년)에 원성벽의 남쪽 해자를 메우고 동문지의 옹성 및 치성, 그리고 그 외곽의 새로운 해자를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의 부속시설로서 동서남북 사방에는 반원형 옹성문을 두고 읍성 네모서리와 동, 서문의 왼쪽 또는 오른쪽에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활이나 창으로 쏘기 위해 성벽 밖으로 돌출되게 쌓은 구조물인 치를 총 6개 배치하였다. 그리고 성벽의 외곽으로는 해자를 둘러 방어했다. 후대에 확장하여 덧붙인 성벽의 성돌에서 창녕부, 진주부민 등의 이름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읍성축조 시 인근 군현의 읍민과 힘을 합하여 성을 쌓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동문지 남쪽 해자 내에서 너비 4.6m의 석축시설과 목제기둥이 2열로 4개 확인되었는데 평소 다리를 걸쳐 놓았다가 유사시에 들어 올리는 조교시설로 보고 있다. 성내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를 비롯한 일부 백자편의 경우는 임진왜란 이전인 15, 16세기에 해당되며 대부분의 자기 조각의 경우는 16~17세기 이후의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편, 성벽 인근과 해자 내부에서 다양한 크기의 둥근 돌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성곽 방어를 위한 투척용 돌로 알려져 있다.

축조과학
웅천읍성의 기초 부분 조성에 이어 흙을 파고 잡석을 다져 넣어 기초를 튼튼하게 쌓았다. 특히, 외벽 쪽 지대석은 지형조건에 따라 높낮이가 다른데 이는 읍성의 좌우로 흐르던 하천의 범람으로 인해 성벽의 유실을 막기 위한 축조수법으로 파악되고 있다. 성벽의 축조수법은 흙을 ‘ㄴ’자 모양으로 반반하고 고르게 다지고, 10cm 두께의 점토와 내벽쪽 1.6m정도까지 축구공만한 크기의 돌을 3단 정도 깐 후 그 위에 두께 20cm 내외의 판돌로 된 지대석을 설치하였다. 성벽은 지대석 끝에서 약 20cm 정도 안으로 물리어 쌓았는데 아랫부분에는 200cm×160cm×150cm 정도 크기의 성돌로 세워쌓기나 눕혀쌓기하고, 위쪽으로 갈수록 이보다 작은 성돌로 눕혀 쌓았다.
북쪽의 원 성벽조사에서 세종 20년(1438년) 〈축성신도〉에서 법으로 정한 체성부의 축조양상과 동일한 축조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축성신도가 반포되기 이전인 세종 16년(1434년)에 연해읍성 축조 규정이 이미 적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원 성벽의 석축 내벽이 계단모양으로 조성된 것에 비하여 단종 1년(1452년) 덧붙여 쌓은 내벽은 수직되게 쌓은 점에서 이시기에 내벽을 쌓는 수법의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감수 : 나동욱 박사
안내
상기 내용은 2015년 전문가 감수를 받아 제작된 자료로 최신내용과 상이할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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