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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 사천 선진리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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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거북선 승전지에 위치한 선진리토성
이름 사천 선진리성
시대 고려
분류 토성
소재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번지 일원
사천 선진리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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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일반설명
선진리토성(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274호)은 사천읍에서 서남쪽 약 7km지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사천만의 동안 중간지점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된 평산성이다. 입지상으로는 해안성에 해당한다. 토성의 규모는 둘레가 920m 정도이며 동쪽 및 남동쪽 2개소에 성문터가 확인되었다. 동문지는 육지와 통행이 가능한 곳으로 적대와 해자를 두어 방어에 중점을 두었으며, 남문지는 남쪽 측벽을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성 외부에서 문지가 직접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였다.
성 내부에서는 기와, 토기, 청자, 백자 등의 조각들이 출토되었으며,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제작된 것들이다.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9세기 전반 이후 10세기 전반인 나말려초(신라말 고려초)에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선조 25년(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5월 왜수군은 이곳에 상륙하여 진을 쳤는데. 이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승전을 한 곳이 바로 이 사천 앞바다이다. 선조 30년(1597년) 1월 정유재란 때 왜장 모리 요시나리가 기존의 토성 상부에 왜성을 쌓았다. 또한, 선진리토성은 선조 31년(1597년) 10월 1일, 경상도병사 정기룡이 이끄는 조선 군사와 명나라 동일원제독이 거느린 조명연합군이 격전을 벌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한 곳이기도 하다.

축조과학
선진리토성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판축토성의 세부적인 축조수법을 확인하였다. 북쪽 성벽에서 확인되는 나무기둥을 중심으로 좌우가 전혀 다른 판축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한 구간의 축조 구분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곳에 따라서는 나무기둥을 중심으로 동일한 토층 양상을 보이는 곳도 있어 2개의 기둥간격인 800㎝ 전후가 하나의 구간일 가능성도 있다. 성벽 중앙에서 확인된 보조목은 성벽 안과 밖의 판자를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기둥을 이탈되지 않도록 잡아 주기 위한 것으로 판축 할 때 기둥이 기존의 안과 밖의 벽뿐만 아니라 성벽 중앙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성은 성벽의 너비보다 넓게 땅을 판 뒤, 사질점토와 암갈색 사질점토를 10~20㎝ 정도 다져 기초부분을 조성하여 판축하였다. 처음 축조한 성벽이 무너진 후 외벽 쪽만 'ㄴ' 자형으로 다시 정리하여 그 위에 다시 판축하였다. 성벽 외벽에는 부분적으로 하단의 기단석렬을 보강하기 위하여 점토를 단면 삼각형태로 보강했다. 성 내,외벽에서 380cm~400cm 간격으로 기둥구멍이 확인되는데 이를 통하여 볼 때 성벽은 구간별로 최초 구간의 판축성벽에 순차적으로 한 구간씩 성벽을 덧대면서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판축 할 때 사용한 내·외벽의 나무기둥은 원형이나 성벽 중앙의 보조목은 사각형의 목재를 사용했다.

감수 : 나동욱 박사
안내
상기 내용은 2015년 전문가 감수를 받아 제작된 자료로 최신내용과 상이할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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