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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 경주 관문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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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산을 연결하여 축조한 장성, 관문성
이름 경주 관문성
시대 통일신라
분류 석성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66번지
경주 관문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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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일반설명
관문성(사적 제 48호)은 경주시 외동읍의 서편, 치술령 줄기의 남쪽에서부터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따라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의 동쪽 산 아래까지 뻗친 길이 약 12km의 석성이다. 경주 주변의 성곽과는 달리 산과 산을 연결하여 축조한 장성 형식의 산성이다. 성문터는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국도로 인해 완전히 파손된 모화리문지와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의 녹동리문지가 있다. 모화리문지의 경우 안쪽 일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기와편이 많이 수습되고 있어 문루나 문지와 관련된 창고나 병사들의 숙소 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덕왕 21년(722년) 10월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모벌군에 성을 쌓았는데, 성의 길이는 6,792보 5척으로 그 규모가 커서 후세 사람들은 신라의 만리장성이라고 불렀다. 축성공사에 동원된 인부 수는 39,262명이었다. 663년에 축조된 부산성과 673년 9월에 축조한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 쪽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인 영일만과 울산만에 상륙하는 왜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여졌다.
헌덕왕 때에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들이 도읍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남동쪽을 방어하는 성으로도 사용하였다. 관문성은 신라의 도성 외곽의 산성을 이용한 1차 방위 체제에 더하여 그 외곽의 방어를 위하여 구축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왜구방비를 위한 장성의 사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축조과학
관문성은 산지의 경우 성벽은 산 능선에서 약간 아래쪽 경사면에 외벽만 쌓는 내탁법으로 쌓았으며 평지나 골짜기에서는 내벽과 외벽을 모두 쌓는 협축법으로 쌓았다.
성벽은 20㎝×40㎝, 30㎝×50㎝ 정도 크기의 가공석과 자연석의 평평한 면을 별다른 손질 없이 성돌로 이용하여 상단으로 올라가면서 1㎝~2㎝씩 안쪽으로 들여쌓아 올리는 물림쌓기 방식을 쓰고 있다. 남산성(南山城)의 경우와 같이 잘 다듬은 직사각형의 돌을 자연석과 함께 성 안쪽으로 1단씩 들여서 쌓았다. 현존하고 있는 남산성의 석축 성벽을 비교해 볼 때 관문성을 축조한 축성술이 훨씬 발달된 축성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감수 : 나동욱 박사
안내
상기 내용은 2015년 전문가 감수를 받아 제작된 자료로 최신내용과 상이할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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